'데이빗 존스' 시절의 데이빗 보위 (David Bowie)

2018.12.17 18:08DAVID BOWIE/Posts


푸른 두 눈을 가졌던 평범한 아이


  1947년 1월 8일, 런던 브릭스톤에서 데이빗 로버트 존스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어머니인 마거릿 매리 "페기"(1913–2001)는 맨체스터에 정착했던 아일랜드계 이민자 출신이며 일반 극장의 종업원이었다. 페기는 어린이 자선 단체에서 일하던 헤이우드 스텐튼 "존" 존스(1912–1969)를 만나 결혼한 뒤 예쁜 사내아이를 얻었다. 런던 남부에 평범하게 살던 존스 가족에게 어린 데이빗 존스는 큰 축복이었다. 스톡웰 초등학교에 다니던 6살짜리 꼬마는 재능 있고 성실하며 싸움이 잦은 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아이는 훗날 자신을 화성에서 온 로커라고 칭하는 '지기 스타더스트', 데이빗 보위가 된다.


음악을 사랑하게 되다


  1955년, 어린 데이빗은 번트 애쉬 중학교의 합창단에 들어간다. 담당 교사로부터 괜찮은 목소리를 가졌다는 평을 받고 평균 이상의 리코더 연주 실력을 선보였다고 한다. 9살 때 가진 댄스 수업에는 '생생하게 예술적인(vividly artistic)' 춤 실력을 뽐냈다고 하는데 당시 교사는 어린 아이치고 뛰어나게 잘 췄다고 증언까지 했다. 같은 해 데이빗의 아버지인 존이 '틴에이저스', '플래터스', '팻츠 도미노', '엘비스 프레슬리', '리틀 리처드' 등 미국 가수의 컬렉션 음반을 구입하자 데이빗은 음악에 대한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나중에 보위가 인터뷰에서 회상하기로는 리틀 리처드의 'Tutti Frutti (1955)'를 듣고 신의 음성을 듣는 줄 알았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어린 데이빗


  데이빗은 자신과 생일이 같았던 엘비스 프레슬리를 특히나 좋아했다. 데이빗의 사촌이 'Hound Dog (1956)'을 틀고 춤을 추는 모습을 봤는데 데이빗은 사촌의 댄스보다도 음악이 가진 힘 때문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팝스타에 대한 어린 데이빗의 열망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듬해 말, 데이빗은 친구들과 함께 세션을 만들어 우쿨렐레와 베이스, 피아노를 연주했다. 이때의 데이빗은 원곡 가수들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엘비스 프레슬리와 척 베리의 음악들을 주로 선보였다고 한다.


플라스틱 소울의 시작


  '플라스틱 소울'은 소울 음악을 부르는 백인들을 칭한다. 원래 소울은 흑인에게서 시작되었지만 믹 재거, 폴 매카트니 등이 선보이게 되자 당시 흑인 뮤지션들이 구분하기 위해 만든 신조어다. 데이빗 보위 역시 플라스틱 소울의 대표주자인데, 소울 재즈에 대한 시작은 10대 때부터였다. 중학교를 마치자 데이빗 존스는 브롬리 기술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예술과 음악, 디자인, 레이아웃, 활자를 배웠다. 이부형제이자 훗날 'Jump They Say (1993)'의 모티브가 되는 형 테리 번스가 데이빗에게 모던 재즈를 알려주자 데이빗은 '찰스 밍거스', '존 콜트레인'과 같은 뮤지션들을 존경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페기는 고등학생 아들의 진지한 모습을 보고 색소폰을 사주었으며 곧 바리톤 색소폰 연주자인 로니 로스에게 수업을 받게 하였다.



음악을 사랑하던 아이, 홍채 이색증이 되다


  1962년,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던 15살 데이빗 존스에게 '데이빗 보위'에 더욱 가까워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여자친구 문제로 고등학교 친구 조지 언더우드와 큰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조지가 데이빗의 왼쪽 눈을 가격하자 데이빗은 4달 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완전한 치료는 불가능했다. 데이빗의 왼쪽 눈은 동공이 확대되었고 원근감을 잃었으며 홍채의 색깔이 바뀌었다. 그러나 변한 눈동자는 이후 데이빗 보위라는 '스타'를 나타내는 데 무엇보다도 선명한 이미지가 되었다. 이러한 싸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빗은 조지와 좋은 친구로 남았고 조지는 보위의 초기 앨범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록 스타가 될 거예요"


  같은 해 데이빗은 조지 언더우드와 함께 '콘래드(The Konrads)'라는 밴드를 공동 결성했다. 지역 청소년 모임이나 결혼식장에서 로큰롤을 연주했으며 인원이 4명에서 8명이 되는 등 정해진 멤버는 없이 활동했다. 196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데이빗은 마침내 부모님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록 스타가 될 거예요." 이때 어머니인 페기는 내심 아들이 기술자가 되길 바랐지만 결국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데이빗 존스, 데뷔하다


  밴드 멤버들과 이견이 갈리자 데이빗은 콘래드를 떠나 또 다른 밴드인 '킹 비즈(King Bees)'를 만들었다. 데이빗은 사업가인 존 블룸을 초대하여 비틀스의 매니저였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처럼 자신들의 매니저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블룸은 승낙하지 않았고, 대신 음반사 경영자인 레슬리 콘에게 추천하여 정식 데뷔를 도와줬다. 레슬리 콘은 서둘리 데이빗 존스를 홍보했다. 'Liza Jane'이 데이빗의 데뷔 싱글이었으며 '데이빗 존스와 킹 비즈(Davie Jones and The King Bees)'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다. 하지만 'Liza Jane'은 성공하지 못했고 데이빗은 킹 비즈를 떠나 몇 달 후 포크송과 블루스를 결합한 밴드 '매니쉬 보이즈(Manish Boys)'에 합류했다. 이때 데이빗은 "믹 재거가 되길 꿈꿨다(I used to dream of being their Mick Jagger)"고 한다.


쉽지 않았던 밴드 활동


  매니쉬 보이즈는 바비 블랜드의 'I Pity the Fool'을 리메이크했지만 'Liza Jane'보다도 실패했다. 좌절에 빠진 데이빗은 다시 밴드를 떠나 '로우어 써드(Lower Third)'에 합류했는데, 이윽고 '버즈(Buzz)'라는 또 다른 밴드에 들어갔으며 'Do Anything You Say'를 발표했다. 이때 데이빗은 '라이엇 스쿼드(Riot Squad)'에도 합류해 오리지널 곡과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의 곡들을 불렀다. 당시 매니저였던 랄프 호튼이 데이빗에게 켄 피트를 소개하였고 켄 피트가 데이빗의 새로운 매니저가 된다.



'데이빗 존스'에서 마침내 '데이빗 보위'로


  데이빗은 이때 아직 데이빗 존스라는 본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자신의 성을 '보위(Bowie)'로 바꾼 이유는 이름이 '더 몽키즈(The Monkees)'의 멤버 '데이비 존스'와 겹쳐 혼동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보위'라는 성씨는 해괴망측해 보여도 19세기 미국의 개척자인 제임스 보위에서 따온, 나름 역사 있는 이름이었다. 데이빗 보위는 1967년 4월에 솔로로 나와 'The Laughing Gnome'라는 곡을 발표했다. 이 싱글이 발매되고 나서 6주 후 보위는 마침내 정규 1집인 'David Bowie'를 발표한다.


  데뷔 앨범 'David Bowie'는 팝, 싸이키델리아, 뮤직홀 등 여러 장르로 이루어진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큰 성공은 이루지 못했고 보위는 2년간 음반 발매를 하지 못하게 된다. 데이빗 보위가 영국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때는 아폴로 11호가 발사되기 5일 전에 발표한 명곡 'Space Oddity' 이후였다. 그 후 데이빗 보위는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페르소나를 선보이며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열망하던 진정한 팝스타로 거듭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