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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BOWIE/Post

데이빗 보위 버클리 졸업식 연설 (1999년)

  정말 감사합니다. Rockers! Jazzers! Samplers!

 

  어젯밤 공연은 무척 환상적이었어요. 웨인과 저는 여러분의 청각과 재능으로 재구성된 저희 작품을 들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답니다. 압도적이었어요. 얼마나 감사할 따름인지 모르실 거예요.

 

  어젯밤 학생들 몇 명과 수다를 떨었는데, 그중 한 명한테 연설할 때 시작하기 좋은 농담과 가장 무서워하는 게 뭔지 물어봤어요. 그 친구가 말했어요. "동시에 알려줄게요. 튜바 연주자가 전화를 받을 때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여보세요, 도미노?"

 

  "...고맙구나." 제가 답했어요.

 

  오늘 수료식이 끝나고 남는 사람들은 저희 부부랑 같이 동네 피자집에서 피자 한 조각 먹어도 괜찮아요. 던킨 도너츠도 괜찮죠?

 

  저의 컬래버레이터이자 동료 뮤지션인 리브스 가브렐스가 이곳 버클리 출신인데 행정실한테 전할 말이 있대요. "마지막 학기 때 미납한 900달러 절대 잊지 않았어요. 1980년 봄부터 빚졌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틴 머신 활동 때 밀렸던 수표가 있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거든요."

 

  아마 쓸어담는다면 30달러 정도는 나오겠네요.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싱어송라이터로서 경력을 쌓았던 방식이기도 하죠. 뮤지션한테 충고할 때마다 늘 "가려운 부분이 있다면, 병원에 가봐."라고 끝나는 듯 싶어요. 현실이잖아요! 하지만 오늘은 그런 말이 절대 도움되지 않을 테죠.

 

  저의 동료인 브라이언 이노는 자신을 뮤지션이 아니라고(Non-musician) 설명했어요. 사실 여권에도 직업란에 그렇게 쓰려고 했죠. [세관원 흉내] "논-뮤지션? 어떤 음반이라도 만들었나요?" [이노 흉내] "물론 아니죠. 저는 논-뮤지션이거든요." 아무튼 저는 스스로를 약간의 논-뮤지션이라고 생각해요. 맨 처음에는 리틀 리처드와 당시 영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바리톤 재즈 연주자, 로니 로스가 공동 출연한 영화를 보고 수업을 들었죠. 그때가 14살 즈음이었는데 로니 로스한테 직접 연락을 했어요. 전화번호부에서 번호를 찾았고 그는 매우 친절히 답해줬죠. 저는 악보에 "두비두비둡"이라고 쓰여 있는 걸 재빨리 깨달았죠. 조지 레드먼 음악이에요. 60년대 웨스트 코스트 밴드인데 잘 모르실 거예요.

 

  "두비두비둡" 제가 연주할 땐 소리가 "브즈즈즈즈"로 들렸어요. 그래서 진정성과 자연스러운 표현 방식은 저의 강점이 되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어요. 사실 제가 가장 재밌어하고 소질 있다고 느낀 건 "만약에?(What if?)"라는 놀이였죠. 만약에 브레히트-바일 뮤지컬이 R&B와 결합된다면? 만약에 프랑스 샹송을 필라델피아 소울로 이식한다면?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리틀 리처드와 잘 지냈을까? 해기스와 달팽이를 같은 접시에 내놓을 수 있을까? 글쎄요. 하지만 몇몇 아이디어들은 아주 효과적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오늘 여기 있다시피 충분한 색소폰과 기타 연주를 배웠고 프로 뮤지션들한테 저의 아이디어들을 전해줄 만한 "작곡가의 피아노" 실력을 배웠죠. 그리고 록 음악이 담고 있는 정보를 바꾸기 위해 일종의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어요. 콜트레인, 해리 파치, 에릭 돌피, 벨벳 언더그라운드, 존 케이지, 소니 스티트를 동경했죠. 불운하게도 앤소니 뉼리,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 조니 레이, 줄리 런던, 전설적인 스타더스트 카우보이, 에디트 피아프, 셜리 배시도 좋아했어요.

 

  셜리 배시에 대해 한 마디할게요. 지기 스타더스트 초창기 시절에 우린 종종 "일꾼들의 클럽"이라고 할 수 있는 꽤 지저분한 클럽에서 공연을 했어요. 나이트클럽 같지만 밥값이 저렴했죠. 온 가족이 올 수 있었어요. 맥주 한 잔, 록 음악, 스트리퍼. 어쩔 때는 다 같은 사람이었고요. 아무튼 어느날 밤 무대 뒷편에서 저는 화장실이 급했어요. 코피를 낼 수 있을 만큼 높은 구두와 도쿄 우주인의 전투복으로 무장하고 있었죠. 공연 기획자한테 거의 비틀거리면서 갔어요. 그한테 물어봤죠.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말해주겠어요?"

 

  기획자가 답하기를, "좋아, 저 복도를 봐. 저 벽 끝에 싱크대 보이지? 그쪽으로 가."

 

  제가 답했죠. "맙소사, 저는 싱크대에서 오줌 안 눌 거예요."

 

  그가 말했어요. "잘 들어봐, 셜리 배시한테도 충분했으니까 너한테도 충분할 거야."

 

 

  저는 나쁜 취향과 좋은 취향을 섞는 것이 종종 제일 흥미로운 결과를 낳는다는 걸 배웠어요. 한 마디로 포크 가수나 R&B 가수, 발라더, 딱 한 가지로 불리는 데 마음이 편치 않았죠. 저는 개별적인 표현보다는 50년대 말부터 시작된 팝 아트의 개념처럼 여러 신호들을 조작하는 아이디어에 점점 더 끌렸어요. 그리고 70년대 초반에는 영국 작가인 사이먼 프라이크가 "아트 팝"이라고 묘사한 걸 직접 만들어냈죠.

 

  내가 사물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보다는 내 주변에 있는 사물이 어떤 감정을 가지느냐였어요. 간단히 말하자면, 로큰롤 계에서 영국인의 진정한 위치를 발견한 거죠. 이 모든 것이 꽤 냉담히 들릴 수도 있지만 믿어보세요. 여전히, 지금까지도, 제가 CD로 가장 환상적인 솔로 곡을 들으면 소리가 희미해질 때마다 그 소리에 비례해서 서둘리 볼륨을 조작해요. 그럼 마지막 음을 잡아낼 수 있죠. 아직도 저의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해요. 저의 위대한 스승인 존 레논을 빼놓고 팝 음악을 논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는 어떻게 해서든 팝의 구조를 뒤틀고 바꾸며 다른 예술 형식의 요소들을 어떻게 스며들게 하는지 정의해주었어요. 종종 극도로 아름답고 아주 강렬하며 기이함으로 가득한 작품을 내놓았죠. 또한 불청객인 존은 태양 아래 있는 어떤 주제든 끝없이 이야기했고 다양한 의견들로 가득차 있었어요. 저는 순식간에 공감을 했답니다. 저희 두 사람이 같이 있을 때마다 마치 만화 속 콤비 같았어요.

 

  존의 매력은 유머 감각이었어요. 초현실적이게도 우린 1974년에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최한 파티에서 처음 만났죠. 테일러 씨는 저를 영화에 같이 출연시키려고 했어요. 배경은 러시아였고 희한한 레드 골드 시스루를 입고 나오는 거였죠. 솔직히 의욕이 없었어요. 작품명이 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워터프론트]는 분명히 아니었어요.

 

  어느날 밤 LA에서 테일러 씨는 파티에 저랑 존을 초대했어요. 선후배 방식으로 둘 다 예의를 지켰던 거 같아요. 비록 몇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로큰롤에서도 세대가 있잖아요? 세상에, 끝이 없죠.

 

  존은 약간 이런 태도였죠. "저기 신참이 새로 오는군." 제 상태는 이랬어요. "존 레논이잖아!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비틀즈 얘기는 하지 말자. 멍청해보일 거야."

 

  존이 말했죠. "안녕, 데이브." 제가 답했어요. "당신 음악 몽땅 다 들었어요. 비틀즈 빼고요."

 

  며칠 후 저희는 그래미 시상식 뒷무대에서 다시 만났죠. 제가 아레사 프랭클린한테 시상을 하러 갔거든요. 무대에 오르기 전에 존한테 가서 미국이 저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고 말했어요. 순전히 오해였지만요. 정신 나갔던 저의 20대를 떠올려봐요.

 

  중대한 순간이 찾아왔고 봉투를 열어 발표했죠. "수상자는 아레사 프랭클린입니다." 아레사가 앞으로 나와서 눈길 하나 없이 제 손에 있던 트로피를 낚아채고 말했어요. "감사합니다, 여러분. 데이빗 보위랑 키스를 하다니 정말 기쁘네요." 안 했으면서! 아레사는 즉시 뒤돌아서 무대를 빠져나갔어요. 저도 슬그머니 무대에서 도망쳤죠.

 

  존이 다가와서 격정적인 키스를 하더니 끌어안으며 말했어요. "봤지, 데이브. 미국은 널 사랑해."

 

  그날 이후 저희는 순식간에 친해졌어요. 존은 한때 글램 록을 립스틱 칠한 로큰롤이라고 묘사했죠. 당연히 틀린 말이지만 무척 재밌었어요.

  

  70년대 말쯤, 저희는 휴가를 맞아 홍콩에 갔어요. 그 당시 존은 전업 주부와 다름 없었고 아들 숀한테 세상을 보여주고자 했죠. 뒷골목을 탐험하는 동안 어느 꼬마아이가 존한테 달려와서 말했어요. "아저씨, 존 레논이에요?" 존이 답했죠. "아니, 하지만 그 놈만큼 돈 좀 벌었으면 좋겠구나." 그 말을 듣고 곧바로 머릿속으로 떠올렸죠.

 

  "아저씨 데이빗 보위예요?" 아니, 그 놈만큼 돈 좀 벌었으면 좋겠구나.

 

  끝내줬어요. 멋진 대답이었거든요. 그 아이는 "아, 죄송해요. 물론 아니겠죠."라고 말한 뒤 뛰어갔어요. 저는 여태껏 들은 말 중 가장 효과적인 대처법이라고 생각했어요.

 

  몇 달 뒤 뉴욕에 돌아가 소호 시내를 걷고 있었는데 어느 목소리가 들렸죠. "당신 데이빗 보위입니까?" 저는 답했죠. "아뇨, 그 놈만큼 돈 좀 벌었으면 좋겠네요."

 

  "뻥치지 마, 새끼야. 나만큼 벌기를 바라잖아." 존 레논이었어요!

 

  이상 제 인생의 몇 가지 순간들이었어요. 지금만큼은 절대적으로 여러분의 순간이에요. 10분 동안 맘껏 떠들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충분히 재미있었으면 싶네요.

 

  음악은 지난 40년간 제게 놀라운 경험을 선사했어요. 음악 덕분에 인생의 고통이나 더한 비극이 사라졌다고는 말 못해요. 하지만 음악은 제가 외로워할 때면 동료애를 일깨워줬고 사람들과 닿고 싶을 때면 소통의 숭고한 의미를 알게 해줬죠. 통찰력을 얻는 입구이자 제가 살고 있는 집이 되어줬어요.

 

  저처럼 음악이 강인한 생명력으로 여러분을 끌어안았으면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명심하세요. 가려운 부분이 있다면, 연주하세요.